소규모 small
전시서문 Exhibition Foreword
벽으로 막아 만든 칸이 있다. 방이 되고, 집이 되고, 미술관이 되며, 때로는 무덤이라 불리는 그곳. 어제의 일들이 고이 수장되는 장소. 어떤 이는 모든 것이 멈춰 있다고, 무엇도 할 수 없다고 느끼는 자리. 《무덤들》은 서슴없이 죽음을 지시한다. 이 글이 놓일 칸, 전시장은 지나가버린 이미지와 물질(만)을 증언한다. 이곳 그리고 저기에, 죽음은 도처의 삶 속에 얽혀 있다. 재난과 전쟁, 도시 개발의 틈새, 일상 속에 실제이자 관념으로 자리한다. 죽음은 어쩌면 끊임없이 지속되는 삶을 통해, 오히려 살아있음 속에서 역설적으로 드러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현재는, 도시는 죽음을 배제한다. 완전함과 정상성, 결과와 효율, 끊임없는 성장을 미덕으로 삼으면서, 허약하고 낡은 것, 죽음에 다가서는 것을 밀어내고 추방한다. 용산과 이태원 일대의 개발은 과거를, 심지어는 재난과 비극마저도 빠르게 허물어버린다. 죽음 위에 새로운 개발과 소비의 욕망이 쌓이고, 그곳엔 낯선 장면들이 세워진다. 누군가는 터전을 잃고, 자신이 쌓아온 공간과 역사에서 간단히 추방당한다. 김주리 · 안경수 2 인전 《무덤들》은 지워지는 죽음을 마주하는 하나의 ‘칸’이 되려 한다. 전시는 죽음을 외면하는 도시의 모순을 어떤 ‘막’이나 ‘물질’로 사고한다. 여기서 ‘무덤’은 단순히 생물학적 의미의 죽음을 소환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살아있는 죽음, 죽어있는 삶의 역설을 중재하며, 한때 삶이었던 죽음을 또 다른 가능성으로 되새기고 감각하는 공간으로 자리한다.
김주리와 안경수는 오랜 시간 작업을 통해 도시 속 소멸하는 죽음/삶과 마주해왔다. 김주리의 <휘경;揮景>(2008~) 시리즈는 점토로 빚은 도시 풍경과 주택이 전시장에서 물에 녹는 과정을 보여주었고, <모습某濕>(2020~) 시리즈는 소멸의 과정을 숨 쉬는 흙으로 물질화하며 생명과 사라짐의 초/자연적 교차점을 가설했다. 안경수의 <막 membrane>(2016)과 <교외 suburb>(2021) 같은 시리즈는 장막처럼 드리운 화면이나 얼룩진 표면을 통해 도시에 소외된 흔적과 그 경계를 담아내며 방치된 장소들의 침묵과 잔재를, 그 정서를 시각적으로 풀어냈다. 그 속에는 고요한 대상들, 단절된 존재의 냉랭한 소외감이 쓸쓸하게 때로는 경이롭게 목격되기도 했다. 박탈과 상실을 내재한 작업들은, 도시의 욕망에 눌려 퇴색되고 망각된 존재들을 어둠 속에 비추거나, 때로는 새로 태어난 (죽음의) 생명력으로 발현시켰다. 그것은 얼핏 절망의 얼굴을 하고 있지만, 그 절망을 직시하려는 강렬한 의지의 서곡처럼 들려왔다.
《무덤들》에서 김주리와 안경수는 과거 작업의 시도를 다시 살피며 도시의 주변화되고 사라지는 장소를 재인식한다. 이전 작업에서 부각된 ‘사라짐’, ‘주변’의 정서는 이번 전시에서 확장된 시간과 장소, 역사 속에 위치하며, 그 기억과 망각의 작용을 되짚어 보게 한다.
흙의 작용을 일종의 은유로, 시간이 지남에 따라 분해되는 장소의 죽음과 생명력을 드러냈던 김주리는 이번 전시에서는 같은 재료를 가마에 굽거나 단단하게 다지고, 또 주형하는 등의 방식을 선보인다. 앞서 언급한 <휘경;揮景>, <모습某濕> 시리즈에서 살아있는 듯했던, 그러나 전시 이후 소멸됐던 흙은, 이번 작업에서 비바람을 맞고 풍화를 거쳐 생성되는 자연 상태의 지형 혹은 형상처럼 굳어져 보다 영속적인 상태를 취하게 된다.
《무덤들》에서 안경수는 어떤 장면/대상을 ‘다시 그린다’. 여기서 ‘다시 그리기’는 단순히 지우기나 덮어쓰기가 아니라, 잔존하는 기록을 다시 새기는 행위에 가깝다. 보광동 재개발 지역을 꾸준히 기록하며 회화로 옮겨온 작가는 전시장 한쪽 벽에 또 다른 공간, 보광동의 어느 “유치원과 화원”을 들여온다. 사라진 장소를 여러 겹의 그리기로 가설한 <유치원과 화원>(2024)은 회화의 ‘막/평면’을 통해 무덤을 자처하는 장면을 만든다. 분절된 동시에 전면화된 시점의 ‘막’은 일차적으로 물리적 ‘면’이나 ‘경계’를 가리킬 뿐 아니라, 도시의 생명과 죽음, 시간과 공간이 복합적으로 얽히는 지점을 환기한다. 각기 다른 회화의 방식과 물성을 결합하고 다양한 재료를 활용해 여러 층위의 ‘막'을 시각화해 온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일종의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회화-막을 선보인다. 그 ‘막’은 특유의 색감과 스며드는 효과, 표면을 확인시켜주는 뿌리기와 흘리기의 방법을 통해 시간의 적층을 고유한 회화적 이미지로 가시화한다. 여기 ‘파노라마’는 특정한 몰입적 시각 경험을 제시하는 틀이 아니라, 가시성의 회화/평면이 실제 공간의 일부로 확장되며 서로 다른 시간과 공간이 존재적으로 얽히는 장소가 된다. 그곳과 이곳, 내부와 외부, 사라진 것과 그려진/만들어진 것이 중첩되고 펼쳐지며, 파노라마적 시각성은 장소와의 연속성 속에서 또 다른 감각을 일깨운다. 이곳의 회화, 그것이 드러낸 소멸은 멀리 떨어져 바라보는 시각적 유희의 대상으로 존재하기보다, 현재의 ‘칸’—존재론적 부피—으로 자리 잡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폐허표본>(2024)은 <유치원과 화원>의 장소/풍경과 관계하며, 이미지가 고립된 공간이 아닌 기억이 상호작용하는 장소임을 명확히 한다. 회화의 시각성을 구체적인 시공간, 장소로 펼쳐 놓는 작가는, 무덤을 자처하는 작업이 삶과 죽음, 안과 밖 등의 경계를 넘어 확장하는 장면을 목격하도록 한다.
《무덤들》에서 두 작가는 물질과 이미지의 고립을 넘어서며 열린 무덤으로의 입장을 제시한다. 이들은 각각 다른 매체와 방식을 통해 사라짐과 존재의 경계를 탐구한다. 그리고 그 경계 속에서 기억을 다시 순환시키는 이미지와 물질의 관계를 파고든다. 두 작가는 매체를 운용하고 규정하는 거창한 말 없이, 망각되는 세계를 마주한다. 그 세계는 쉽게 소진되지 않는다. 마치 무덤 앞에 서는 일, 할 수 없음으로 시작되는 과정처럼, 전시는 사라짐을 재인식하며 자기 내외부의 존재를, 그 소멸을 되짚어 본다. 그렇게 칸 안에 자리한 무덤은 사라짐을 기억 너머의 의미로 되살리고, 어떤 존재와의 연결을 되새긴다.
지구의 유일한 자연위성인 달은 종종 ‘죽은 행성’으로 간주된다. 생명체 활동도, 지질학적 변화도 목격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달의 중력은 지구에 밀물과 썰물을 일으키고, 지구 자전에 제동을 걸어 24 시간의 하루, 오늘을 만든다. 인간은 달을 올려다보며 소원을 빈다. 저 죽음에는 결코 거머쥘 수 없는 움직임이 자리한다. 오늘의 궁핍을 초과하는 무엇이 그곳에 존재하는지도 모른다. 그곳에 죽음의 이야기들이, 숨결들이 세워진다.
기획/글 권혁규
위 내용은 전시 소개 자료에서 발췌하였습니다. The above is an excerpt from the exhibit introduction.
2020
미술관 Museum
서울특별시 종로구 계동길 84-3, 1F 1F, 84-3, Gyedong-gil, Jongno-gu, Seoul
Phone: 02-742-9146 Fax: Email: museumhead.seoul@gmail.com
※ 관람시간 화,수,목,금,토요일 12:00 - 19:00 ※ 휴관일 월,일요일 ※ 주차 주차 공간이 협소하니 대중교통을 이용해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