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 상세
Background Frame for Exhibition Poster, 권진규의 영원한 집
Exhibition Poster for 권진규의 영원한 집

권진규의 영원한 집
(KWON JIN KYU FOREVER HOME)

전시서문 Exhibition Foreword

2021년 7월 (사)권진규기념사업회와 유족은 많은 사람이 권진규의 작품을 접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서울시립미술관에 총 141점의 작품을 기증했습니다. 기증작품은 1950년대부터 1970년대에 이르는 조각, 소조, 부조, 드로잉, 유화 등으로 다양한데, 특히 1950년대 주요 작품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큽니다.

2022년 미술관은 기증자의 뜻을 기리고, 권진규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고자 대규모 회고전 ≪권진규 탄생 100주년 기념―노실의 천사≫(2022.3.24.―5.22.)를 개최했습니다. 전시 기간 중에 (사)한국근현대미술사학회와 <권진규 탄생 100주년 기념 학술대회>를 공동 개최하여 기존 연구의 오류를 정정하고, 새로운 연구 결과를 냈습니다. 이어 순회전으로 ≪영원을 빚은, 권진규≫(2022.8.2.―10.23., 광주시립미술관)를 공동 개최했습니다.

2023년 미술관은 권진규 작고 50주기를 맞아 벨기에영사관이었던 서울시립 남서울미술관 1층 5개의 전시실을 권진규 상설전시실로 조성합니다. 구벨기에영사관과 권진규는 굴곡진 동시대를 살아왔습니다. 대한제국(1897―1910)은 세계열강들의 각축 속에서 주권을 지키기 위해 중립국 정책을 추진했는데, 이를 위해 벨기에와 외교적 연대를 맺고, 벨기에는 중구 회현동에 벨기에영사관을 지었습니다. 그러나 대한제국의 중립국화가 실패하면서, 이 건물은 광복 이후 여러 용도로 사용되다가 도심재개발사업으로 관악구 남현동으로 이축되었고, 2004년에는 소유주인 우리은행이 서울시에 영구무상 임대하여, 미술관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권진규는 일제강점기를 거쳐 광복 이후 한일국교단절 상황에서 한국과 일본을 어렵게 오가며 조각가로 활동했습니다. 그가 남긴 작품은 우여곡절 끝에 미술관이라는 영원한 안식처를 찾았습니다. 이제 남서울미술관과 그의 작품은 서로를 품으면서 그 존재와 의미를 강화하게 됩니다.

권진규에게 진정한 작품은 자기 주변의 대상을 끊임없이 관찰, 연구하여 단순히 본질만을 담아낸 것이었습니다. 그가 추구한 것은 사실적인 것도, 아름다운 것도 아닌, 결코 사라지지 않는 영혼, 영원성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고대와 현대, 동양과 서양, 여성과 남성, 현세와 내세, 구상과 추상의 경계를 넘나들었고 종래는 이를 무화無化하는 작품으로 자신만의 모더니티를 구현했습니다.

“진실의 힘의 함수관계는 역사가 풀이한다.”라는 권진규의 시구처럼, 지금은 어떤 제약도 없는 동시대 미술에서 그의 작품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고 다양한 해석으로 풀어낼 때입니다. 이에 미술관은 그간의 연구성과를 반영해 상설전시 ≪권진규의 영원한 집≫을 개최합니다. 전시는 도쿄 무사시노미술학교 시기의 ‘새로운 조각’, ‘오기노 도모’, ‘동등한 인체’와 서울 아틀리에 시기의 ‘내면’, ‘영감’, ‘인연’, ‘귀의’ 등 7개의 소주제에 맞는 작품과 자료로 구성되어 그의 작품세계 전체를 집약적으로 보여줍니다. 이와 함께 서울시립미술관은 남서울미술관을 통해 권진규 관련 기관을 연결하여 작품과 자료를 공유하고, 연구자들이 새로운 연구결과를 낼 수 있도록 지원하고자 합니다. 상설전시는 앞으로의 연구성과물을 반영하여 정기적으로 작품과 자료를 일부 또는 전면 교체하여 변화를 줄 예정입니다. 이로써 서울시립 남서울미술관은 권진규의 영혼이 영원히 살아 숨쉬는 집으로 자리잡게 될 것입니다.

권진규 Kwon Jin Kyu

<p>권진규는 일제 강점기였던 1922년 4월 7일 함흥에서 유복한 집안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릴때부터 만들기를 좋아했던 그는 1947년 이쾌대李快大(1913-1965)가 운영하던 성북회화연구소에 입학했다. 무사시노미술학교의 전신인 제국미술학교 출신인 이쾌대의 영향으로, 그는 1949년 3월 무사시노미술학교 조각과에 입학해 본격적인 미술교육을 받았다. 이때 체계적으로 배운 미술이론과 다양한 작품제작 기법은 그의 작품 세계 전반을 이루는 중요한 토대가 됐다.
    권진규는 부르델(Emile Antoine Bourdelle, 1861-1929)의 제자 시미즈 다카시清水崇(1897-1981)에게 부르델의 정신과 조각이론에 근거한 교육을 받으면서 부르델과 그의 제자 자코메티(Alberto Giacometti, 1901-1961)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부르델은 로댕(Auguste Rodin, 1840-1917)의 조수였지만 그의 영향에서 벗어나 자신의 길을 찾고자 했고 이를 위해 서구 문명의 근원인 고대 그리스 아케이즘archaism 양식으로 거슬러 올라가 새로운 예술을 창조했다. 부르델은 "나는 영원한 면을 찾아, 비본질적인 것에서 도망쳤다."고 말했다. 권진규 역시 신라시대의 조각 전통을 인식하고 있었고, 동서양의 고대를 반영하면서도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만들어갔다는 점에서 부르델을 닮았다. &lt;도모&gt; 연작에서 볼 수 있듯이 그는 초기부터 전체적인 구조와 본질을 중시하여 세부를 생략하고 형태를 단순화했다. 그는 일본조각과 달리 한국조각에서는 일반적인 석조로 제작한 현대적인 말, 테라코타로 제작한 두상 등으로 니카전과 이치요오회 미술전람회에서 크게 인정받았다. 그러나 이러한 성취를 뒤로하고 1959년 그는 홀로 된 어머니를 돌보고, 스승의 영향에서 벗어나고자 귀국했다.
    1960년대에 권진규는 손수 지은 아틀리에에서 작업에 정진했고, 여가에는 동서양의 고대미술, 현대미술 외에도 문학, 역사, 음악 등 다양한 분야에 몰두했다. 이를 반영한 그의 작품은 동물상, 여성상, 자소상, 부조, 불상에 더해, 탈, 가면, 기물, 잡상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그의 작품은 &lt;지원의 얼굴&gt;(1967)로 대표되는 여성 흉상으로 유명하지만, 사실 그는 자신을 예술가이기 전에 장인으로 칭했고, 그 옛날 이름없는 장인들이 남긴 문화 유산에 가치를 두었기 때문에 작품의 대상이나 크기에 따라 특별한 위계를 두지 않았다. 다만 그는 일관되게 눈에 보이는 대상 너머 존재하는 본질을 추구하였고, 이를 위해 동양과 서양을 종횡으로 누비며 다양한 문화유산을 재해석한, 자신만의 강건하고 응축된 형태로 영원성을 구현했다. 이는 그가 전통적인 기법으로 썩지 않는 테라코타와 방부 · 방습 · 방충에 강한 건칠로 현대적인 작품을 제작한 이유이기도 하다. 그간 "권진규는 미술계와 일반의 냉담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어떤 특정한 사조에 속하거나 단체에 가입하지 않았다."라는 서술이 별도의 사실 확인 없이 반복적으로 쓰여왔다. 그러나 새로운 연구결과에 따르면 그는 한국과 일본에서 개최된 개인전으로 항상 언론의 주목을 받았고, 일본과 한국의 재야전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그는 일찌감치 일본 니카회 주최의 니카전에서 여러 차례 수상했으며, 「조선일보」 주최의 현대작가초대미술전에서 여러 차례 초대작가로 선정됐다. 1968년에는 한국조형작가회의에 회원으로 등록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미술시장에서 조각작품 판매는 쉽지 않아 그는 생활고에 시달렸고, 동상제작, 해외전시 등이 무산되면서 건강마저 악화되자 작업의 동력을 완전히 잃었다. 그는 타고난 재능, 학구적 태도, 유연한 사고, 성실한 작업으로 기존의 문법을 쇄신하는 전위적 작가로 독자적인 작품세계를 구현했음에도 불구하고 1973년 5월 4일 오후 세상을 등질 수밖에 없었다.
</p>
view 01
view 02 권경숙 인터뷰, <나의 오빠, 권진규>, 2022, 40분 49초
view 03
view 04 권진규, <자소상>, 1970년대, 석고, 31x16x20cm

<자소상>(1970년대)은 작품을 고정할 수 있는 별도의 장치가 없는 얼굴 조각이지만 마스크는 아니다. 작품을 전시하는 방식을 고안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권진규의 병세가 깊어진 1970년대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넓은 이마 중앙부에 약간의 머리카락을 덩어리로 표현하였다. 코는 길고 입은 꼭 다물었으며 눈을 감은 모습으로 눈두덩이가 표현되었다. 광대는 내려앉았고 피부도 느슨해 보인다. 마치 데드 마스크에서 보이는 것과 같은 눈두덩은 의문을 불러일으킨다. 그럼에도 작은 흙을 붙여 손으로 눌러 표면을 마무리하는 방식은 이 작품에서도 적용되고 있다. 1997년에 출판된 『한국의 미술가 권진규』 (삼성문화재단)에서 이 작품에서 '하악골이 길고 깡마른 얼굴에서 병이 깊어 가고 있는 자신의 얼굴에 대한 정직한 관찰의 태도를 발견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 데드 마스크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 두상은 삶과 내세의 중간지점에서 인간이 영혼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view 05
view 06 권진규, <선자>, 1967, 석고, 29x14x15.9cm

<선자>(1967)는 이화여자대학교 서양화과에 재학 중이던 이선자를 모델로 한 작품이다.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시선, 머리카락을 최대한 생략하여 입체적으로 묘사한 얼굴이 권진규가 제작한 여성 인물상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권진규의 테라코타 특징은 두상頭上의 머리 가운데 선이 뚜렷하게 나타나느 데 있다"고 한도모 여사의 말처럼 이 작품은 코를 중심으로 상하 좌우로 형틀 선이 선명하게 남아있다.

view 07 좌) 권진규, <경자>, 1971, 건칠, 46.4x36.4x27.7cm 우) 권진규, <예선>, 1968, 테라코타, 46x31.7x25.2cm

<경자>는 1967년 홍익대학교 제자 최경자를 모델로 제작한 테라코타 작품의 틀을 이용해 1971년경 다시 건칠로 제작한 작품이다. 권진규는 일찍부터 건칠에 관심을 갖고 있었는데, 1969년 집 근처 부흥교회에서 의뢰한 그리스도상을 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건칠 작업을 시작했다. 권진규는 주로 삼베를 사용했는데, 권경숙에 따르면 집에 삼베 이불이 많기도 했고, 그가 삼베가 오래가고 한국의 것이라는 자부심으로 고유의 특성을 살려 작업을 했다고 한다. <경자>는 마치 삼베가 다 일어나고 빛이 바랜 듯 보이지만, 실은 그의 건칠 작품의 고유 특성이다. 건칠 작품은 재료가 천과 옻칠인 데다가 속이 비어 가볍지만 작품의 느낌은 내면의 무게감으로 결코 가볍지 않다.

    &lt;예선&gt;은 당시 신인 소설가 신예선을 모델로 한 작품이다. 신예선은 1966년 『에뜨랑제여 그대의 고향은』을 출간했다. 권진규는 이 책을 읽은 뒤 그에게 모델을 제의, &lt;예선&gt;을 제작했다. 이는 그가 소설가로 활동하면서도 권옥연, 김흥수 화백과도 예술적으로 깊이 교류했기에 중간에서 권옥연이 다리 놓는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후 그는 미국으로 이주, 꾸준히 글을 썼고 극작가, 음악인 등 많은 예술가들에게 예술적 영감을 주는 동시에 시대와 장르를 넘나드는 예술적 영향력을 발휘해왔다. 그 역시 일찌감치 그의 문학에의 열정을 이해하고 내면의 단단함을 작품에 담았음을 알 수 있다.
</p>
view 08
view 09 권진규, <기사騎士>, 1953, 안산암, 65x64x31cm

<기사騎士>(1953)는 1953년 제38회 니카전에서 특대를 수상한 작품이다. 언뜻 보면 직육면체의 돌덩어리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제목처럼 말 등에 올라탄 ‘기사’의 팔과 다리, 그리고 머리가 정면에 보인다. 그 반대편에는 말 머리로 이어지는 기사의 팔과 다리가 묘사되어 있다. 앞쪽은 말머리, 뒤쪽은 기사의 등이 표현되어 있으며, 위에서 보면 말머리의 정수리에서 갈기를 거쳐 기사의 머리로 이어지는 형태로 이루어졌다. 이렇게 다섯 면이 모두 다르게 묘사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보는 각도에 따라서 다른 느낌을 준다. 동물의 특징을 단순하게 표현했지만, 고부조로 묘사한 기사의 인체와 저부조인 말머리가 유기적으로 잘 연결되어 있다. 세부 묘사를 최대한 자제한 대신 돌의 질감을 강조하여 원시성이 돋보인다. - 신수경, 충남대학교(연구교수)

view 10
view 11
view 12
view 13 권진규, <마두 B>, 1953, 안산암, 30x70x18cm

<마두 B>(1953)는 1953년 제38회 니카전에서 입상한 작품이다. 권진규는 일생에 걸쳐 온갖 양식으로 말을 제작했으며, 그 제작 기법 또한 석조, 테라코타, 건칠 등으로 다양하다. 일본 유학 시기 말을 소재로 한 작품은 대부분 돌로 제작했는데, 이 작품 역시 석조 작품이다. 형태는 단순하지만, 원통형의 긴 콧마루와 쫑긋 세운 귀, 갈기 등 말의 특징을 잘 포착했다. 특히 절제된 표현과 안산암 특유의 풍화된 듯한 질감이 어우러져 고대 유물을 연상시킨다. 이러한 특징 때문에 그의 동물 조각은 '고졸미古拙美'나 '소박한 매력'이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view 14
view 15 권진규, <춤추는 뱃사람>, 1965, 테라코타, 58x79x7cm

<춤추는 뱃사람>(1965) 은 권진규의 다른 부조 <두 사람>(1964)과 제작 방법이나 표현이 유사하다. 인체표현이 지극히 단순한데, 얼굴은 고대 에게 미술의 키클라데스 인형 얼굴처럼 코만 표현되어 추상적이다. <드로잉 북 3>(1964) 에서 7월 26일 자 드로잉 좌측 하단 그림 아래 “初期キクラテス文化 子持壺ケルノスの?片”, 즉 “초기 키클라데스 문화의 귀단지 케르노스의 파편”, 제일 아래 “마야 문화는 고구려(중국 동북지방)의 벽화와 흡사, 공통점이 없다고 아니할 수 없다."라는 메모가 있다. 다음 쪽에는 채색 드로잉과 함께 "女人偶像, 初期キクラテス文化", 즉 "여인상, 초기 키클라데스 문화", "ハ?プを?く人像" , 즉 "하프를 연주하는 사람"이라고 적혀 있다. 이는 에게 문명의 초기에 해당하는 '키클라데스' 문명의 유물인 <여신상 Female cycladic idol>(2,700-2,300 B.C.) , 도판을 보고 따라 그린 것으로, <춤추는 뱃사람>, <두 사람>(1964) 에 적용했다. 여러 면으로 구성된 작품에서 몸통은 흙을 콩알처럼 작게 뭉쳐서 하나하나 붙였고 배는 직사각형 무늬를 흙 위에 찍은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바탕은 표면을 섬세하게 긁어내는 방법으로 다양한 질감을 담았는데, 이는 그가 따랐던 부르델의 영향으로 볼 수 있다. 각 조각은 구워 낸 뒤 합판 위에 석고와 접착제로 고정해서 하나의 화면으로 구성했다.

view 16 권진규, <흰 소>, 1972, 테라코타에 채색, 31.1x46.5x42.1cm

<흰 소>(1972)는 이중섭의 작품 <황소>(1953)를 모본으로 제작된 작품이다. 권진규는 1972년 3월 개최됐던 이중섭의 15기 유작전을 두 번 다녀왔는데, 여기서 작품 <황소>와 <흰 소> (1954년경)를 보고 크게 감동받았다. 그는 급한 대로 마침 갖고 있던 『황순원 전집』 제2권(창우사, 1964) 내지에 이들을 드로잉 했다. 한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이 책에 <황소들>이라는 단편소설이 실려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이중섭과 함께 김환기, 박수근 등의 작품을 자주 칭찬했다고 한다. 유족에 따르면 <흰 소>(1972)는 굉장히 빠른 속도로 만들어졌는데, 이중섭의 소만큼 생생하고 힘찬 기운이 느껴지는 작품이다. 그가 마지막으로 제작한 작품이라는 점에 특별한 의미가 있다.

내용은 전시 소개 자료에서 발췌하였습니다. The above is an excerpt from the exhibit introduction.

참여작가

전시공간

  • 서울시립미술관 남서울관Seoul Museum Of Art (Nam-Seoul Branch)

    • 설립

      1983

    • 구분

      미술관

    • 주소

      서울특별시 관악구 남부순환로 2076
      2076, Nambusunhwan-ro, Gwanak-gu, Seoul

    • 연락처

      phone : 02–2124–8800
      fax :
      website :
      email : sema@seoul.go.kr

    • 운영정보

      ※ 관람시간 화,수,목,금요일 10:00 - 20:00 (입장마감: 관람 종료 1시간 ) 토,일,공휴일 10:00 - 18:00 ※ 휴관일 1월 1일, 매주 월요일(월요일이 공휴일인 경우 정상 개관) ※ 관람료 무료 ※ 주차 미술관 내 주차 시설이 없으므로, 인근 사당 공영주차장을 이용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Loading...

전시

  1. »